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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념 갈등의 심층…제18대 대통령선거전<12>
제2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일제히 만난 미소 군정 당국자와 좌우 양파의 지도자들(1947년5월)

재검증이 필요한 남북의 건국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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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경우는?
'서쪽 벽'에 일체감

한반도의 남북 관계와 독일의 동서 관계, 한국과 서독, 북한과 동독의 상황이 비슷해 보이면서도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한반도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라 여겨진 동서독의 통일(1990년10월)이 먼저 이뤄진 것은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 때문이다.

한반도의 남북 문제를 통일 지향적으로 생각하는데 있어 동서독의 관계와 대조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유사성과 이질성을 확인하면 북한 독재 정권과 종북세력의 독특함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우선 서독과 한국의 건국 과정을 개괄하자.

종북이나 '친북·반미' 성향의 세력은 북한이 항일 독립 운동을 계승하는 통일 세력이 만든 '자주의 나라'= '선의 나라'인데 반해 한국은 미국과 친일·보수의 분단 세력이 만든 '예속의 나라'= '악의 나라'라는 허구를 유포해 왔다.

독일의 경우 서독에 있어 동독은 국제법상 존재하지 않는 구독일의 소련 점령지에 불과하고 동독에서 보는 서독은 나치스의 후계자인 복수주의자의 집단이었다('전후 독일­그 지적 역사' 미시마 켄이치 저·이와나미 신서). 1960년대 후반 서독의 젊은이는 '30살 넘은 사람은 및지 말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나치스와 관계가 있는 기성 세대와의 대결 구도를 선명히 드러낸다.

서독과 한국의 건국 과정에는 분단 국가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논란이 항상 따라다녔다. 미·소 양군이 똑같이 주둔(서독에는 영·불군도)해 그 관할 분계선이 국토 경계선이 됐다. 건국은 한국이 1948년8월 북한이 1948년9월. 서독이 1949년5월, 동독이 1949년10월. 형식상의 정부 수립은 모두 서쪽이 한 걸음 앞섰다.

동서독의 균열이 깊어진 것은 미·영·불이 점령 정책을 효율화하는 트라이존을 형성해 1948년6월에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수습할 수 있도록 통일 통화를 발행하고 나서부터다. 소련도 3일후 미리 계획한 대로 신통화를 발행해 서베를린(베를린은 동독 지역내에 있는 격리된 영토)을 경제적으로 봉쇄했다.

무엇이 분단의 계기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미·소를 축으로 동서 양진영의 각축은 이미 빼도 박도 못하는 단계에 있었다.

소련은 나치스 독일로부터 해방돼 점령한 지역에 차례대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해 나갔다. 서방 제국의 위기의식이 매우 고조된 가운데 서독의 건국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산주의의 서쪽 확산을 저지하는 벽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이는 소련에 의한 서베를린 경제 봉쇄에 대한 격분과 그 궁지를 구하기 위해 11개월간에 걸쳐 전개한 대대적인 공수작전으로 서방 제국·시민의 일체감이 고조된 가운데 맞이하게 된 것이다.

통일 국가로서의 주권 회복은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켜 나치스까지 낳은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속죄의 뜻에서 서독 시민도 강하게 바라지는 않았다. 미·영·불 등 서방제국과 소련도 강대해지기 쉬운 통일 독일의 출현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서독은 '동독과 통일 후에 헌법을 제정한다'는 입장에서 헌법을 갖지 않고 이를 대체하는 기본법을 규정하는 것에 알 수 있듯이 장래 통일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강한 의지를 숨기고 분단을 숙연히 받아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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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기구 확립으로 앞선 북쪽
남쪽의 좌우 격돌 여파…김구 등 협상파도 교묘히 이용

독일이 동서 대립의 제1전선이었다고 하면 한반도는 제2전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적어도 서독 정도 한국에 정력을 쏟지 않았다.

한반도의 38선 이북에서는 1945년8월25일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이 사령부를 설치하자마자 그날로 남북을 잇는 철도, 전화 회선을 차단하고 38선을 봉쇄해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금지시켰다.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위원회'를 해체하고 '평안남도 인민 정치위원회'로 개편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한반도 전역으로 영향력이 있던 인물의 한 명 중도 좌파의 여운형이 조직했다. 좌파적인 성향을 띤 이 활동조차 강권에 의해 정지 당한 것이다.

같은 시기 이북에서 가장 신망이 있던 중도 우파 조만식은 1945년11월 민족 독립·남북 통일·민주주의 확립을 3대 강령으로 삼는 조선민주당을 결성해 당세력을 급속히 확대시키고 있었다. 반소·반공의 유혈 사태를 동반하는 궐기·시위가 잇따르는 등 통일·독립을 바라는 민족주의·민주주의 세력의 힘은 이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소련군은 전차 전투기까지 동원한 무차별 사격으로 이를 진압했다.

민족파 탄압

민심을 끌어당긴 조선민주당의 조만식도 1946년1월 소련 당국의 공갈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신탁통치한다는 모스크바 결정(1945년12월)에 반대해 소련군에 체포·연금된 채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됐다.

한편 김일성은 1945년10월 신설된 '조선공산당 북한 분국'의 책임자로 등장해 소련 당국은 '김일성 환영 평양 시민대회'를 준비했다. 1946년2월에 조직된 '북한 임시인민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취임한 김일성은 3월에 북한 토지개혁 법령을, 8월에는 산업 국유화를 공포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스크바 결정에 따라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의 제1차 회의(3월20일 개최)가 시작되기 전에 이북에서는 벌써 단독 통치기구가 강권적으로 형성돼 오늘날 북한의 골격을 이루는 주요 법률이 시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김일성 종합대학은 설립준비위원회가 1946년5월에 발족돼 같은 해 10월에 설립됐다. '북한인민위원회'(1947년2월 개편)은 해방 후 첫 최고교육기관에 나타난지 아직 7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김일성의 이름을 쓴 것이다. 벌써 국가로서의 이념과 가치관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증거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국가 상층부에 일당 독재당이 군림한다. 그 독재당이 재빨리 이북 전역을 완전 지배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1946년6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쪽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제창하는 담화(정읍 발언)를 발표한 것은 이남의 책임지도자로서 너무나 당연했다. 오히려 이북에서 기성 사실화된 일련의 흐름을 추인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늦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남에서 미군 당국이 좌파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는 것은 1946년5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조선공산당이 당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고액의 위조 지폐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시킨 사건)부터다. 본격화된 것은 같은 해 '9월 총파업'을 앞두고 발령한 공산당 간부의 체포 명령부터다.

이남의 정치 환경은 그 당시 이북에서의 민족·민주 세력과 달리 좌파가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 후로도 1946년12월에 조선공산당을 주체로 결성돼 1949년6월에는 북한노동당(1946년8월 결성)과 합류해 조선노동당의 일익을 담당한 '남노당(남조선노동당)' 등 좌파 세력이 창궐(창궐)하기에 이르렀다.

1947년10월 미소 공동위원회의 제2차 회담이 결렬되자 한반도 문제는 UN에 상정됐다. UN은 1947년11월 조선 전체에서 통일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다. 이를 소련이 반발해서 무산되자 1948년2월 남쪽만 단독 선거를 결의해 같은 해 5월10일 이른바 '5·10 단독 선거'를 치르게 된다.

이남은 이로 인해 한층 더 좌우 각축이 심화돼 분해 직전의 양상을 나타냈다. 하나는 제주도 4·3 사태 등 비참한 유혈 사태를 포함한 '남노당'이 주도의 과격한 반대 운동이다. 4·3 사태는 선거 유권자 등록 기간(3월29일~4월9일)이 한창일 때 일어났다(여수·순천 사건은 이를 진압하려고 출동 준비중이던 국방군내부의 반란). 또 하나는 민족주의자에 의한 남북 협상 움직임이다.

소련 붕괴 후에 공표된 문서 '조선 관련 문제에 대한 소련공산당 정치국 결정'에 따르면 김구와 김일성에 의한 남북 협상(1948년4월23일)은 평양 주둔 소련 군사령부가 건의해 열렸다. 급속도로 진행되던 북한 단독 정권 수립 준비를 위장하기 위한 연출이었다.

혁명 기지 착착

실은 김구도 김일성이 단독 정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다. 평양행에 앞서 '남북 협상이 실패하면 단독 선거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혀 김일성과 회담 결렬 후에는 '남쪽의 움직임을 핑계로 단독 정부를 수립한다는 북쪽의 태도 또한 민족 분열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김구는 끝까지 단독 총선거를 거부했다.

생애를 독립 운동에 바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까지 맡은 김구가 선거에 참가했다면 한국 건국은 민족 세력 규합으로 보다 구심력을 갖췄을 것이다. 적어도 한국이 반통일 자세가 만든 '악의 나라'라는 사실 왜곡의 여지는 없어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에 비해 치밀하게 준비한 다음 한국의 움직임을 따르는 형태로 건국한 북한은 전민중으로부터 축하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북의 반체제 세력이 벌써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1948년3월1일을 기해 조직적으로 저항한 마지막 세력 천도교도 1만여명을 검거해 상당수를 학살했다.

흉포한 가해자라서 민족주의적 욕구를 억제해 분단을 조용히 받아들인 서독. 열강의 경쟁 속에서 식민지로 전락돼 해방 후에 어느덧 첨예해진 동서 대립으로 인해 분단을 강요당한 한국. 연속적인 피해를 입은 약소 민족으로서 통일·독립을 추구하는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북을 혁명 기지로 삼아 한반도 전역을 '해방'시키는 노선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었다. 남쪽의 일부 지도자가 이북의 이런 현실에 엄격히 대처하지 않고 민족 감정을 앞새워 결과적으로 이용당한 것은 건국 전후사의 또 다른 불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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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 북에서는?
'건설'에 중용 마다하지 않아…김일성 '의심 품는 것은 잘못'

대한민국은 전국민의 축하 속에 건국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절차를 거쳤다. 첫째 이북의 정치 탄압이나 잇따른 피의 숙청이 베일에 가려져 있었는데 비해 4·3사태의 인상이 부각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둘째 당시 공산주의는 제2차 대전중 식민지 지배나 침략에 저항하는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던 기세를 살려 아시아·아프리카에서 민족 통일·독립에 대한 희구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서쪽 선진 제국의 대부분은 식민지 지배국이자 민족 해방 투쟁의 대상이었다. 공산주의 운동은 국제 연대와 선전에서 우위에 있어 이 또한 북한에게는 순풍이 됐다.

셋째 미군정은 행정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구친일파를 포함한 보수 친미파를 중시했다. 항일 독립운동의 주인공이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그 토대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어 친미파로 새 단장한 친일파 정권이라고 지탄받을 여지를 남겼다.

그럼 친일파 청산 문제로 한국을 공격해 온 북한은 스스로 어떻게 대처했을까.

북한의 과학백과사전 종합출판사의 역사서 '조선 전사' 현대편은 '김일성 동지는 과거에 조금 공부해서 일제 기관에 복무했다고 언제까지나 그러한 지식인들에게 의심을 품고 멀리하는 잘못된 경향을 비판하면서 (중략) 그들을 신조국 건설의 자랑스러운 과정에 참여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또 김일성이 과학자, 기술자, 문화 예술인 등 지식인을 인민 정부기관, 주요 기업소나 교육·문화·보건 등 각 기관의 주요 자리에 배치했다고도 기술하고 있어 '부르조아 사상의 뿌리를 뽑아 (중략) 맡은 혁명 임무를 책임감 있게 수행했다'라고까지 칭찬했다.

소련 당국도 경제 관련의 인재 등용에서는 실용적인 태도를 취해 일본인 기술자와 일본 기업에 종사한 조선인 기술자를 우대했다. 북한은 정부 수립 후에도 일본인 기술자의 귀국을 허가하지 않아 잔류한 일본인 기술자는 1948년11월 당시 868명으로 기록돼 있다. 고위 기술자에게는 각료급을 웃도는 고액의 보수를 지불해 흥남 비료공장의 어느 일본인 기술자는 '노동 영웅'마저 수장했다.

명확히 친일파라고 규정된 경력을 지니면서 정권 중추에 들어간 인물도 적지 않다. 김일성의 친동생으로 부주석을 맡아 오랫동안 제2인자 지위에 있었던 김영주가 그 전형이다. 그는 관동군의 통역 및 보조 요원으로 활동한 경력이 특정돼 있다. 아사히신문 서울 지국이나 총독부 어용신문 기자들이 노동신문과 선전 부서 요직에 앉기도 했다.

2,000시간 이상 비행한 일본 공군의 에이스였던 이씨는 일본군 파일럿 출신의 동포 20명을 조직해 북한 공군의 창건을 주도해 영화 '붉은 날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가 2007년7월에 사망했을 때 김정일은 애도의 뜻을 보이며 꽃다발을 선사했다.

북한은 한국의 '일제 강점하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규정하는 이른바 친일파를 한국 못지 않게 '활용'해 왔던 것이다.

일제에 협력한 경위는 다각적으로 검증돼야 하며 그 후의 공헌을 모두 부정할 정도로 과거에 중점을 두어서는 안된다. 한국이 미국과 친일·보수의 분단 세력이 만든 '악의 나라'라고 보는 입장은 힘을 합쳐 무에서 유를 창출한 노력을 특정 정치 입장에서 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2012-10-03 민단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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