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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념 갈등의 심층 - 제18대 대통령 선거전 <13>
서독 건국 후, 처음으로 국가를 뒤흔든 젊은이들의 '대반란' = 1968년 4월

미래를 닫는 '역사허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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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68년 세대'의 반란
통일 향한 지각변동 일으켜 - '과거의 극복'으로 의식 공유


대한민국의 건국(1948년 8월)은 서독이 시민과 서쪽 제국의 일체감에 휩싸여 출범한 것과는 달리 격한 진통을 수반했다. 게다가 좌우의 격돌이 침체되지 않은 채 2년 후에는 북한의 6·25 기습남침으로 인해 국토가 잿더미로 바뀌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벗어날 전망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빠른 부흥 위해

서독은 반대로 한국전쟁이 세계적인 물자부족을 초래하자 소련 지배지역으로부터 대량의 피난민이 저임금의 숙련 노동력을 제공한 것도 있어 세계의 수요에 응하여 보다 빨리 수출입국의 발판을 굳혔다. 서독의 부흥이 '경제의 기적'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50년부터다.

한국에서는 1960년의 4·19 학생혁명에 의해 건국의 아버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하야(下野)하고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는 1961년 육군 소장 박정희에 의한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서독에서는 여기서도 반대로 아데나워(1949~1963년), 에르하르트(1963~1966년)와 CDU(기독교민주동맹) 주도로 장기적으로 안정된 정권이 이어진다.

경제 성장에서 압도적으로 선행한 서독은 분단국가로 인한 정치적 시련에서도 기선을 잡는다. '한강의 기적'은 아직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다.

독일제국의 붕괴에 따라 등장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 최첨단 민주주의 헌법에 따라 나치를 대두시켰다. 이 쓰라린 경험이 대중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낳은 서독은 국민투표제도를 마련하지 않고, 국민의 정치 참가는 4년에 1번 있는 총선거 뿐이라는 '국민주권'이 아닌 '의회주권'이라고도 비꼬는 철저한 간접민주주의제도를 취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직접민주주의를 제창하는 의회 외 시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대학 민주화·베트남 반전운동을 거쳐 1968년을 정점으로 한 젊은이들의 대반란에 이른다. 최대의 초점은 비상사태법(자연재해, 내란, 전쟁 등 비상사태 때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분적으로 제한하고, 연방군의 투입을 인정하기로 한다"의 제정 저지다.

서독에서는 1966년 건국 이래 첫 경기 후퇴가 세계공황(1929년)을 연상시키면서 몇몇 주 의회에 진출한 극우의 NPD(독일국민민주당)가 나치 대두의 악몽을 되살아나게 했다. 비상사태법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지금까지의 CDU와 CSU(기독교사회동맹)의 연립에 최대 야당 SPD(독일사회민주당)가 가담한 대연립정권(같은 해 12월 발족)에 의해 추진된다.

'68년 세대'로 불리며 대반란의 주체가 된 것은 최초의 전후 세대의 학생들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도이념으로, 반공일변도로 서독의 국력 증강에 의해서만 통일이 가능하다고 하는 노선 나치의 대두를 허용한 부모세대와 그 세대가 계승하는 전통적인 가치관, 이를 바탕으로 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 이에 강렬한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기성세대 비판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슬로건이 '(나치와 관계가 있던) 30세 이상자는 믿지 말라'로, '68년 세대'는 '경제의 기적'조차 더러운 것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론을 정리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분단을 기정사실화한 서독으로 인해 동독은 짐을 짊어졌다. 나치에 의한 최대 피해국 소련은 전독일을 대상으로 한 배상을 동독에서 착취할 수 밖에 없고, 경제 재생의 담보가 되는 공업자산으로 파괴를 면한 것은 죄다 현물 배상으로 충당, 철도의 레일은 물론 침목까지 가지고 사라졌다. 마셜플랜(미국의 유럽 경제부흥 원조계획) 등 서방의 위신을 건 풍부한 지원을 활용할 수 있었던 서독의 경제발전은 동독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다'

사실은 어떤가. 서독에는 중공업 등 전쟁을 가능하게 하는 산업은 모든 해체하거나 파괴되고, 농업과 시골의 나라로 바꾸는 것을 목적으로 한 모겐소플랜(1945~1950년)이 적용됐다. 많은 지적 재산이 몰수되고 연행된 우수한 과학자·연구자도 적지 않다. 마셜플랜(1948~1951년)에는 상환의무가 있는데다 연합국에 대한 배상이나 주둔군의 경비 지출이 더 큰 부담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68년 세대'는 풍요를 누리며 그것을 가능하게 한 노력, 격차 확대의 근원인 동독의 소련형 사회주의 경제와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사회적 균형(평등)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 정책은 '모든 국민에게 번영을!'이라는 슬로건 아래 '경제의 기적'을 이끌며 신화의 영역에 이르고 있다 .

각지에서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충돌을 속출시켰다. '68년 세대'는 1968년 5월에 비상사태법이 성립되자 기운이 약해지면서 대부분이 SPD의 청년조직에 흘러들었고, 몇몇 정치그룹으로 분열, 과격한 일부는 1970년대 서독을 뒤흔든 테러조직 RAF(적군파)를 결성한다.

젊은이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은 서독이라는 국가의 정당성에까지 파고들어 과거를 망각하는 일에 대한 경종이 되기도 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나치의 죄과를 나치에만 돌리지 않고, 전독일인이 짊어져야 할 문제로 직시하고, 동독문제를 포함한 '과거의 극복'에 힘쓰는 토양을 경작한 것은 틀림없다.

서독에서 처음으로 좌파 정당(SPD)이 집권하여 동방정책을 제창하는 브란트가 수상이 된 것은 이 시기다. SPD는 1863년 이후의 역사를 가진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1959년에는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 마르크스주의에서 이탈하여 '안전한 좌파 국민정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여물어가는 동방정책

브란트는 동유럽 제국과 관계개선을 도모하고, 동독에 독자적인 국가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했다. 국제법상의 독립국가로 승인하지는 않지만 서로 대표부를 두고, 협력·교류를 도모하는 것을 제창한 동서독관계 기본조약을 1972년에 조인. 1973년 9월의 유엔 동시가입에 이어 1974년에는 대표부를 상호설치한다.

'접근을 통한 변화'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동방정책은 CDU와 동맹국으로부터 '굴욕과 겉치렛말을 통한 변화'라는 야유를 받으며 동독의 독재정권에 봉사할 뿐이라고 계속 규탄받았다. 그러나 동서관계의 지각은 이미 변동하고 있으며, 1982년에 정권을 탈환한 CDU의 콜은 소극적이면서도 동방정책을 계승한다.

이것이 가진 임팩트는 지극히 컸다. 동방정책이 SPD의 전매 특허가 아닌 보수를 포함한 서독 전체의 이른바 국익에서 나오는 정책임을 증명하고, 동쪽 제국의 더 큰 신뢰를 거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일은 동서 건국으로부터 40년만에 벽을 붕괴시키고, 41년만에 통일을 실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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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명해야 할 산업화 세대
전대미문의 국가 만들기 - 실의의 국민에게 자신감 가져다 주었다


비스마르크에 의한 1871년 통일 이후 독일은 근대국가를 운영하는 능력, 지적 재산 및 산업력을 축적하고, 나치에 의한 지배나 패전과 분단에 의해서도 서독에는 지력면에서 위대한 유산이 있었다. 통화개혁과 '사회적 시장경제' 정책을 성공시켜 2대 수상이 된 에어하르트는 그 상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봉건왕조국가에서 전쟁수행과 착취를 일삼는 일제의 지배, 그 후의 미군정을 거쳐 탄생한 대한민국은 어떠했는가. 일제는 지배 기간내내 우리민족의 경제운영과 과학기술 능력을 철저히 제어했다. 근대국가로서의 운영능력은 애처로울 정도록 부족했다.

이런 참상에서

국고금 처리 관계의 전모를 아는 사람이 없고, 화폐 발행업무에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조선은행(일제의 특수은행)에서 하위직에 있던 사람 뿐. 국제개발은행과 국제통화기금에 가입하는 1954년 당시만 해도 국민소득, 수출입액, 외환보유고 등 필요한 기초통계자료가 없어, 일제 말기에 작성한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했을 정도다.

1961년 당시 사무관 이상의 공무원 중 대졸은 20% 미만. 테크노크라트는 없고 국가경제에 관한 지식은 물론 산업분야를 파악하고 있는 관리는 전무에 가까워 제1차 5개년계획(1962~1966년)은 당초 공장의 건설일람표에 불과했다.

식민지 시대에 배출된 이공계 인재는 약 400명, 그 중 박사학위 취득자는 불과 6명. 일본은 1940년 한 해에만도 이공계 졸업자는 6만명 가까이 된다. 당시 한반도에 있던 대학은 경성제대 뿐으로 이공계가 설립된 것은 1941년. 해방될 때까지 34명을 배출하는데 그쳤다. 이공계에서는 다른 전문·고등학교가 4개교 있었을 뿐이다.

산업화 시대를 이끈 경제 관료와 기술자는 어떻게 양성된 것인가. 교육기관이 아니라 현장에서 그것도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길러진 것이다.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1970년대 초두, 대형선박 건조 실적과 시설이 없는 채 첫 해외수주가 된 26만톤급 유조선 2척을 건조한 울산현대조선소다.

그런 식으로 2척의 건조와 조선소 건설을 동시에 진행시킨다고 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그래도 1974년 여름에는 2척의 명명식과 조선소 준공식이 동시에 거행됐다. 당시의 회장 정주영(鄭周永)이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사진을 보여주고 2척 수주에 성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국경제 끌어올리기엔 1970년대의 중동 건설이 있다. 여기에 투입된 기술·인력은 베트남전쟁 때 미군의 하청 등 시설 설영으로 축적됐다. 영어로 된 도면을 보기 위해 공업고 3학년 2000명이 맹특훈을 받아 그들이 연상의 기술자에게 작업을 지시했다고 한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서독에 파견 된 약 8000명의 광산 노동자, 1만2000명의 간호사의 존재도 잊어서는 안 된다. 1960년대 초, 최빈국인 한국에 상업차관을 제공해 준 것은 서독 뿐이었다. 그것을 보장하는 수단이 없는 한국은 광산 노동자 5000명, 간호사 2000명의 파견을 약속하고 임금을 담보로 하여 도입한 것이다. 노동자는 응모가 쇄도, 경쟁률은 10배를 넘었다. 게다가 고학력자가 많아 나중에 대학 교수가 된 사람이 30 명에 달한다.

쓰레기통에 장미

"세계는 당시, '전후의 한국경제 재건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피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도 살기 위해 지원했다. 1964년 12월에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독일을 방문, 분진 투성이가 된 우리의 까만 손을 잡고 '무사히 작업을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주세요'라고 말을 걸어 주셨을 때, 모두가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었다"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의 회장 김태우(金泰雨)가 2010년 12월 파견 47주년을 기하여 서울에 모인 300명 앞에서 이렇게 말하자 모두가 눈시울을 붉히며 흐느껴 울었다.

한국경제가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7년 말, 급조한 것이지만 잘 팔리던 크리스마스카드가 있었다. 일러스트는 밀짚모자에 선글라스를 낀 '박정희 아버지', 메시지는 '과거의 강건하기까지 한 의지가 논란 속에서도 경제의 신화를 세웠다 :: 우리도 일어나 소리 높여 외친다. 달인으로 건강하게 살자'였다. 경제불황이 정신적 지주를 박정희에게 요구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 김대중은 1999년 5월 정적(政敵)이었던 박정희의 생가를 방문하여 "경제건설을 이루고, 6·25 동란 이후 빈곤과 실의 속에 있었던 국민에게 자신감을 가져다 준 공적은 다대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전 대통령 김영삼이 같은 무렵 "박 정권은 군사 쿠데타로 민주헌정을 중단시키고, 국민에게 고통을 계속해서 안겨 준 독재정권으로 미화는 용인될 수 없다"고 성명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니고 옳은 것은 옳다고 하는 김대중과 같은 자세는 그 후에도 대세가 되지는 않았다. 국정능력은 물론 자본도 기술도 지적 재산도 없이 체면을 내팽개치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피로 물든 역사는 오히려 바닥에서부터 부정되어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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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패배·예속사관'
검정교과서에까지 - 최고지도자 스스로 재청산도


노무현은 대통령 취임연설(2003년 2월)에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세력을 얻는 뒤틀린 풍토는 청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독에서는 '68년 세대'에 의한 자국의 정당성 부정을 한국에서는 최고지도자 스스로가 행한 것이다.

2004년에는 '일제 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가동시켰다. '친일에서 친미, 친독재로 권력에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인 변질을 반복한 자들과 반성하지 않는 그들의 후예'를 규탄하는 것이 목적이다.

2004년에는 그러한 사고를 고조시킨 고교생용 근현대사 교과서가 검정을 거쳐 발간됐다. 북한의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을 높이 평가하고, '우리식 사회주의'의 근본은 '창조적인 활동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조선민족 제일주의」'에 있다고 기술하는 한편, 이승만은 미국에 예속되어 '반공정책을 친일파 처리문제보다 중요시'하고 박정희의 개발정책을 "각종 기계와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도입하여 공장을 일본자본으로 건설함으로써 한국경제는 미국은 물론 일본에도 예속되게 됐다"고 몰아세웠다.

이런 종류의 허구를 바탕으로 한 세뇌교육이 상당히 오래 전부터 실시되고 있던 것은 연재 10회째(9월19일)의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페이지에서도 봤다. 그 침투력은 무섭다고 할 수 밖에 없다.

'2004년 1월 육사 임시 입학생 의식조사 결과'(250명 대상)가 2008년 4월 조사 당시의 교장에 의해 밝혀졌다. 4년의 공백은 공표가 망설여질 정도로 충격적이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국의 주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34%가 미국을 들고, 북한은 33%였다. 국군의 엘리트 예비군이라 해도 이렇다.

'동아일보'는 사설(2008년 4월5일자)에서 여자중학생 역사(轢死)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반미데모(2002년)가 전개된 점을 염두에 두고, "그들과 같이 전교조 교사의 의식교육에 노출된 많은 젊은이들이 친북반미의 선봉에 선 것을 우리는 목격해 왔다"고 언급, "청소년시대에 학교에서 배운 것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통일의 걸림돌

노무현은 2005년 현충일 추모연설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나라가 독립했지만 우리만큼 큰 성취를 이룬 나라는 없다"며 현대사를 왜곡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그 자세로 일관하지 않았고, '역사허무주의'를 수정하지도 않았다.

'6·29선언'(1987년)을 끌어내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1980년대의 민주화 투쟁은 보수·혁신의 틀을 넘어선 국민적 욕구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증식한 '주사파'와 그에 연관된 운동권 '386세대'의 대부분은 서독의 '68년 세대'와는 달리 자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것 또한 남북통일로의 건전한 프로세스를 왜곡하는 요인이 되고있는 것이다.

(문중 경칭생략)

(2012-10-15 민단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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