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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념 갈등의 심층…제18대 대통령선거전<9>
1996년 8월 연세대학 농성 사태. 기동대를 저지하고자 하는 학생 데모대

'주사파' 재생산은 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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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 기반 거의 상실
한 때는 총력 10만도


종북주의, 종북세력 등의 용어는 북한 공작기관의 지령을 받아 움직인 비밀결사 일심회 사건을 계기로 한 민주노동당의 내분으로 PD파가 처음으로 입에 올린 이래 유포된 것이다. 현재 진행중인 통합진보당의 내분으로 다시 그 존재가 부각되고 있다.

이 종북세력의 중핵이야말로 북한의 '남조선 혁명'노선 =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을 핵심으로 하는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북한을 현실적인 '민주기지'로 '남조선 혁명'을 수행하고자 하는 '주사파'다.

현존 세력은 어느 정도인가.

'주사파의 대부'라 불리며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 1992년 결성, 1997년 해체 결의, 1999년 적발)의 총책이었던 김영환(金永煥)은 주사파의 성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조선일보' 7월31일자에서 요약)

한총련의 조락(凋落)

"1980년대 말엔 핵심과 주변 동조자를 합쳐 주사파를 10만 정도로 봤다. 99년 말엔 많이 잡아도 1만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김정일에 호감을 갖거나 북한에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늘었을 수 있지만 그런 태도와 민혁당 잔류파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종북 사상으로 무장한 것과는 차이가 엄청난 것이다. 그런 골수 주사파는 지금은 1000명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학생 운동 기반이 거의 붕괴했고 주사파의 재생산 구조가 붕괴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급진적인 학생운동단체였던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연합회)'는 1993년 4월에 결성됐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1987년 8월 결성)' 재부에서 지금까지와 같은 정치투쟁 일변도에서는 변용하는 학생들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자기비판이 커져 '전대협'을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한총련'을 발족시킨 것이다. 고려대에서의 출범식에는 8만여명을 동원했다.

80년대의 민주화 진전은 정치운동보다 취직활동에 열심인 학생을 늘렸다.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의 새단장은 무관심해지는 일반 학생도 범위에 망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도세력은 그대로 '주사파' 계열이 우세를 유지했다.

'한총련'의 노선대립은 이미 1995년 전후부터 표면화된다. 김영삼의 문민정부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어떠한지, 그리고 그 투쟁방식은? 나아가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어떻게 추진해 나갈지가 주된 쟁점이었다.

NL파 = 주사파는 문민정부와 전면적으로 대결하며 폭력투쟁 불사도 부추겼다. 통일운동에 대해서도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중심으로 남북통일연대를 한층 강화하는 차원에서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범민련은 북·남·해외 3개의 본부로 구성되어, 북측 본부는 대남 공작기관인 통일전선부을 그 실체로 하고 있다. 남측과 해외 본부는 북측의 지도를 받는 종북세력의 덩어리이다. 대법원은 남측 본부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있다(연재6 = 7월25일자 기술).
 
불신과 허탈감

이에 대해 '한총련' 자체의 개혁을 요구하는 경기 인천지역, 전북지역, 서울지역 일부 대학이 결집한 '혁신계열'은,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군사정권이 아니라며 폭력투쟁을 부정, 통일운동도 각 지역에서 대중과 함께 전개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양자의 갈등은 1996년 8월 연세대 농성사태에서 폭발한다. 주사파가 주도하는 '한총련'은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 주최의 통일 대축전이 개최 불가능해지자 북한 대표를 초대하기 위해 평양에 파견한 학생 2명을 환영하는 형식으로 통일 대축전을 강행했다.

이를 해산시키려 한 기동대에 맞서 구내 농성 끝에 약 4300명의 학생이 연행되고 444명이 구속·기소됐다(모두 학생운동사상 최대의 수). 110명이 유죄, 그 중 51명에게는 징역 8개월부터 3년의 실형 판결이 내려졌다.

범민련 주도의, 즉 종북주의에 의한 통일운동과 문민정부 타도운동이 보여준 시대착오는 '혁신계열' 학생들을 이탈시킬 뿐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 실망감을 퍼뜨렸다. 이 투쟁으로 단련되었어야 했던 신입생들은 불신과 허탈감을 안고 운동권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올 것이 왔다고 해야 할까. 한양대에서 열린 '한총련'의 1997년 출범식에서 '혁신계열'에서 보낸 스파이로 의심되는 학생이 심문·구타를 당해 사망한 것이다. '한총련'이 린치 살인을 저지르고, 게다가 사건을 은폐하려 한 것이 밝혀지자 시민으로부터 엄중히 규탄받고 '한총련'은 결정적으로 고립되어 간다.

주사파의 재생산 공장이 조업 불능이 되어 활동가를 공급할 수 없게 된 의미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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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볼 수 없는 '민혁당' 잔재
과반수 이상이 잠복? - '이념' 파탄해도 결속?

실상 알고 동요


'한총련'의 몰락은 노선투쟁이나 연세대 사태, 린치 살인사건 만이 원인이 아니다.

주사파가 이끄는 학생운동권에서는, 동유럽 사회주의 제국의 붕괴 후에도 살아남은 주체사상의 북한을 존경하고, 실체사회주의의 마지막 보루로 버티기 바라는 심정이 횡일했다. 이것이 당시의 주사파 운동을 뒷받침하는 동력이었다.

그러나 대남혁명의 기지이자 통일 주체세력인 북한이 실은 수백만을 아사시키는 비극의 땅에 불과하다. 게다가 300만명을 아사에서 구할 피 같은 돈 8억 9000만달러를 김일성의 묘지 건설 등에 쏟아붇는 잔인함을 가진다. 90년대 중반부터 이러한 북한의 적나라한 실상이 밝혀졌다. 이것이 동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져왔던 것이다.

중심적인 리더라고 해도 그 예외는 아니다. '한총련'의 조국통일위원회 정책실장이었던 최홍재(崔弘在)는 1993년 '(자신처럼) 김일성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매우 강했던' 어느 동지를 북한 공작기관과의 접선을 유지하기 위해 베를린에 보냈다. 대량 아사 소식이 전해진 당시를,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조선일보' 6월8일자).

"나는 탈북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체제에 비판적인 탈북자는 원래 신뢰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를린(의 동지)에게 물었다. '인민들은 굶어 죽었나', '그렇다', '노동당 간부는 어떠한가', '유복하게 잘 살고 있다'. 인민을 위한 당 간부라면 똑같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최홍재는 1995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재판에서 그는 "나는 조국통일을 바라는 학생에 불과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을 알 필요가 있었고, 김일성과 주체사상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주사파 학생이라면 누구나가 사용하는 방편이라 하여 이렇게 계속했다.

"나는 대한민국의 체제를 전복시키고 북한과 같은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나 뿐만 아니라, 주사파 학생들이 안고 있는 공통의 소원이었던 고려연방공화국을 건설하려 했다"

땅에 떨어진 혁명모델. 주사파 학생 사이에 부끄러운 생각, 자기혐오가 확산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최홍재 자신은 1998년 8월 '전향'을 표명했다. 이러한 각성의 하나 하나가 큰 흐름이 되어 주사파의 모판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학생운동권은 퇴색하여 활동력을 공급하는 기능을 거의 잃었다.

그렇다면 '한총련' 세대의 선배격인 386세대(90년대에 30대가 되고, 80년대에 학생운동을 한 60년대 출생)로 주사파가 한쪽으로 치우친 시대에 단련된 활동가들은 어떤가.

불과 100명

주사파 속의 주사파라 불리며, 골수분자가 집결한 민혁당의 전모는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민혁당 관계자나 좌파 운동권의 소식통 사이에서 민혁당 당원은 100명 규모였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당원은 나를 포함해 전국에서 100명에 불과했다. 이것이 운동권의 요로를 장악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현재 차관급 관료인 민혁당 출신자의 증언. 월간 '신동아' 5월호).

"당원은 100명이었다. 반제청년동맹을 포함한 산하 18개 지하조직의 구성원은 400명 정도. 총 500명 정도의 핵심을 중심으로, 대중단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활동가 1000여명이 외곽 조직원으로 총괄되어 있었다"(월간 'NK비전' 7월호. 연재 '종북주의를 해부한다').

"민혁당의 영향하에 있었던 자는 적어도 수천명에 달한다. 당원은 100명이지만 그 밑에 수많은 합법단체마다 세포가 있었다"(어느 NL파 출신자의 말. '신동아' 5월호).

지하당의 대부분은 합법적인 의상을 입은 중간단체나 하부단체를 두고 활동의 손발로 삼을 뿐만 아니라 연막으로 삼아 왔다. 재판이 되더라도 "하부단체에 관여했지만 본체에 대해서는 그 존재 자체를 모른다"고 강변하는 것으로, 죄상을 가볍게 할 뿐만 아니라 본체 조직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민혁당'의 적발은 우발적이었다. 북한의 반잠수정이 격침되어 관련 자료가 우연히 발견된 데 따른 것이다(연재7 = 8월15일자 기술). 당국이 전혀 감지하지 못했을 정도로 비밀 유지가 뛰어났던 것이다. 1992년 3월 결성으로부터 7여년 동안 민혁당이 크고 작은 지역 단위의 조직 뿐만 아니라 사업별로 각종 중간·하부단체를 다수 보유한 것은 틀림없다.

지하에서 연동도

민혁당 당원 100명 중 '전향'한 것은 25명이라는 견해가 있다(NL파 출신자. '신동아' 5월호). 결성을 주도하며 일관되게 총책에 있으면서 해체를 결의한 김영환. 그의 제안으로 조기에 출두한 15명. 그 후 자수 또는 체포 후 '전향'한 멤버도 있었다(비공개의 경우도 많음).

민혁당 서열 5위였던 이석기(李石基, 4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당선)처럼 이른바 '비전향'팀이 그 존재를 공공연화시킨 사례는 극히 드물다. 서열 2위였던 하영옥(河永沃)을 비롯해 당원의 과반수 이상이 잠복한 상태인 셈이다. 게다가 '잠복 당원'에는 상당수의 활동가들이 연동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액상화 지반의 386세대
반미·친북 의식 여전히 - 각계에 뿌리내려 이익집단화


주사파의 실세력과 영향력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의 필두는 역시 소수이기는 하지만 강력하게 조직된 민혁당의 잔여 세력이다. 진보신당 당원이 민혁당 재건파를 중심으로 주사파의 잔재가 형성한 전국넷 경기동부연합에 대해 "내가 싫어하고 배척하는 조직이지만 그 활동상은 존경할 만하다. 진보신당이 이길 리가 없다"(연재7 = 8월15일자)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영향력 측면에서 놓칠 수 없는 요소는 주사파 학생운동에 몰두한 386세대의 기질이자 국가와 사회에서 차지하는 강력한 발판일 것이다. 민혁당 잔여 세력을 진원으로 삼는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 진동을 더 크게 증폭시켜 국가의 토대를 액상화시킬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북 비판하면서

민주노동당의 핵심 당원 2명이 관여한 일심회에 대해 '전향 386세대' 8명이 "일심회 간첩사건은 북한과 이어지는 주사파 세력이 여전히 한국사회에 건재하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고, 기자회견에서 "지금도 주사파의 철학을 담은 메모리칩을 뇌 한 구석에 간직한 채 청와대(대통령부), 정부, 국회, 시민단체 등의 권력 중추에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는 자가 상당수"라고 지적했다(중앙일보 2006년 11월3일자).

386세대의 대부분이 50세 전후가 되어 국가와 사회의 각 영역에 뿌리를 내리고, 그 나름대로 중량감 있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회의원이나 공안기관을 포함한 고위 공무원, 판사·변호사의 법조계, 영화나 무대 등 문화연예계, 신문·TV 등 언론기관, 시민·노동운동 단체 등 영역은 폭넓다.

주사파나 북한에 맹종하는 386세대는, 지금은 소수이며 오히려 북한의 3대 세습과 핵무기 개발, 미사일 발사 등에는 비판적이기 조차 하다. 하지만 학창시절에 쌓은 반미·친북의 좌파적 정서에는 더 강한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 대세다. 이러한 견해는 특히 실정을 잘 아는 운동권 출신에 눈에 띈다.

"북한 정보는 과장·왜곡되어 있다. 기아가 발생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렵고 인권이 유린되괴 있다 해도 미 제국주의와 싸우는데는 대항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상당 수의 386세대가 이러한 의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주사파 학생운동 출신자는 이념적인 집단의식은 옅어졌어도 현실적인 이해관계 세력으로 성장했다. 김대중·노무현 양정부의 10년간 강력한 정치집단이 됐다. 노무현 시대에는 대통령부에 운동권인 386세대가 대거 진출한 것은 잘 알려져있다.

기득권에 집착

전술한 '전향 386세대'의 기자회견에서, '프리존 뉴스' 현대표 강길모(姜吉模)는 이렇게 밝혔다. "옛 동지 중에는 '생각은 바뀌었지만 운동권 경력과 인맥으로 출세한 이상 입장은 바꿀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 주사파의 사상이 직업이 된 사람도 적지 않다"

김영환도 이렇게 지적했다. "(주사파 운동 경험자에게 있어서) 북한의 진상이 자신이 믿어 왔던 모습과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기득권에 대한 집착도 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이 거기(주사파 운동)에서 태어난 것인 만큼 그것을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는 순간 기득권을 모두 잃게 된다"

(2012-09-05 민단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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