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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오사카 사천왕사와 경주 황룡사는 닮은꼴(?)
▲ 5층탑과 금당.
▲ 사천왕사 입구의 도리이
▲ 사천왕사 전경을 소개한 안내판

황룡사 복원을 세계 이목이 쏠리는 국책 프로젝트로 만들면 어떨까?

경주 황룡사를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해보면 어떨까? 당시 건축된 중국과 일본, 동남아 등지의 사찰 유형과 특성을 살피는 ‘포럼’을 정기적으로 열어 실제 모습에 가까운 설계도를 확보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 포럼을 동북아 3국, 나아가 세계 학술계의 축제로 만들어서 경주와 황룡사를 중심에 두고 과거재현기술을 선도하는 국책 프로젝트로 만들어가면 어떨까?

이런 상상을 해본 것은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를 돌아보면서였다. 오사카 시가지 안에는 사천왕사라고 하는, 1400년의 역사를 가진 오랜 사찰이 있다. 이 절은 나라(奈良)의 호류지(法隆寺)와 함께 일본 불교 전래 초창기에 건립된 것으로, 일본 최초의 절로 알려져 있다.

사천왕사 건립과 관련해서 일본 서기는 흥미로운 얘기를 전한다. 일본에 불교가 도입되자 도입 찬성파와 반대파가 대립을 하게 되었다. 찬성파는 도래인세력으로 알려진 소가씨, 반대세력은 전통 장인세력인 모노노베씨였다. 새로운 사상의 도입과 이에 따른 사찰건립이라는 대형 국책사업과 신기술 도입 등을 둘러싸고 신구세력간의 갈등이 노출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당시 불교 도입 찬성 편에 선 쇼토쿠(聖德)태자는 반대파와의 전쟁에서 이기면 절을 지어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맹세하고, 전쟁에서 이기자 불법의 수호신인 사천왕을 기리는 시텐노지를 건립했다는 것이다. 기원 593년의 일이다.

신라의 황룡사가 만들어진 것은 앞서기는 했으나 비슷한 시기였다. 황룡사는 경주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신라 제일의 사찰이었다. 기원 553년(진흥왕 14)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이를 불사(佛寺)로 바꿔 황룡사라 하고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까지의 발굴에 따르면 황룡사 규모는 약 2만5000여 평에 이른다. 유지(遺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중문(中門) 탑 금당(金堂)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밖에도 금당 뒤에 강당과 회랑이 있었던 자리가 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의 정형인 일탑(一塔)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공히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절의 중심은 구층목탑이었다.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율사의 건의로 선덕여왕때 만들었는데, 백제의 명공 아비지(阿非知)가 목재와 석재로 건축하고, 용춘(龍春)이 소장(小匠)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으며, 총 높이가 225척이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을 보면 황룡사의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일본 사천왕사는 신라 황룡사와 절 배치방식이 같다. 둘다 남쪽에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일자형 배치방식이다. 절 주위로 회랑을 둔 것도 같은 방식이다. 그리고 탑도 하나씩이다. 황룡사는 9층탑으로 높이가 67m로 추정되며, 시텐노지는 5층탑으로 높이가 39.2m이다.

사천왕사를 둘러보며 황룡사의 복원을 생각한 것은 사천왕사 역시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수차례 훼손와 복원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시텐노지 5층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5층탑 훼손과 복원의 역사가 사진과 함께 소개돼 있다.

시텐노지는 과거부터 소실과 중수의 역사를 수없이 반복했다. 가깝게는 1934년 태풍으로 탑과 중문이 붕괴되고 금당이 기울어지는 피해를 입었다가 1940년 복원됐다. 이어 2차대전 말엽인 1945년 대공습으로 절 건물 대부분이 전소돼 1963년부터 1979년에 걸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는 것이다.

황룡사 9층탑도 훼손과 중수가 거듭됐다. 황룡사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했다고 한다. 하지만 1238년 몽고군 침입때 절 전체가 불타면서 그후로는 더이상 중수되지 못했다.

신라 천년 고도 경주는 실크로드의 동쪽 주요 거점이었다. 당시 장안에 이어 가장 큰 국제도시이기도 했다. 황룡사는 그런 도시에 걸맞는 대형사찰로 발전했으나 몽고군 침입으로 불탄 이래 재건되지 못했다. 국운이 기운 고려는 황룡사를 재건할 힘이 없었고, 성리학을 내걸고 억불숭유정책을 취한 조선은 불교사찰 건립에 결코 국고를 투입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생각을 바꿔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넓은 황룡사터를 공지로 해서 그대로 두는 게 과연 능사일까? 아니면 다시 황룡사를 복원해 세계 학계의 시선이 쏠리고,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이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대형 프로젝트로 만드는 게 좋을까? 과거를 보존하자면, 새로 짓는 황룡사 아래 과거의 유지를그대로 보존하면 되지 않을까? 시텐노지의 도리이 문을 나서면서 얼핏 든 생각이다.
(오사카=이종환 월드코리안신문 발행인)

(2016-08-22 민단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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