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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5년 8월∼1950년 6월

가.1945년10월 「재일조선인련맹」의 결성, 신탁통치문제로 좌우대립이 격화되어 반공청년을 중심으로 「조련」에서 이탈하여,「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을 결성함.
1946년1월「신조선건설동맹」(건동)이 결성되어, 건청과 합동으로 1946년 10월3일「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 발족, 귀국사업후원, 민생문제 지원등을 위해 GHQ 및 일본정부와 협상함.

나.민단과 조련의 투쟁이 격화됨. 1946년7월 건청과 조련이 격돌한 川崎사건을 비롯해,1949년4월의 東京枝川사건,같은 해 5월, 좌우학생들이 충돌한 조선장학회사건,8월의 민단·조련의 일대결전이었던下關사건 등이 발발함.

다.1948년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같은 해 9월8일 민단은 정부로부터 재일동포의 유일한 공인단체로서 인정받음.
같은 해 9월28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개칭하였고, 1994년4월20일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2) 1950년대

가.1950년6월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한국동란이 발발함.
조련은 1949년 GHQ에 의해 해산 당하고 일본공산당 지도하에 「민전」을 조직하여 격렬한 무장 투쟁을 전개해 민단과도 치열한 대립투쟁이 일어남.

나. 1950년7월 민단은 644명의 재일청년학도를 중심으로 학도의용군을 조직하여 인천상륙작전 참가를 위시하여 조국전선에 파견함.

다.1953년7월 정전이후에도 각지에서 6·25때의 대립감정으로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1955년「재일본조선인총련맹」으로 노선전환과 탈바꿈한 구조련을 상대로 통일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함.

라.1959년8월 민단은 일본적십자와 북한적십자 사이에 체결된 「재일조선인귀환협정」에 의해 조총련동포를 북한 공산치하에 북송하는 것은 인도적인 면에서도 용납될 수 없다하여 「북송반대투쟁」을 전개함.

 
3) 1960년대

가.본국에서 「4·19혁명」, 「5·16군사혁명」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민단내에서는 본국에 대한 자세 문제로 일시적인 혼란이 일어났고, 같은 시기에 민단에 대한 조선총련의 공세가 격심해짐.

나.1965년 「한일회담」 타결을 둘러싸고 민단내에서는 찬·반 양론으로 다소 혼란이 있었으나 본국의 발전을 위해 민단으로서는 대국적 견지에서 한일협정 내용에 순응키로 함.

다.1966년1월부터 1970년1월까지 한일협정에 의한 영주권신청운동에 역량을 경주,신청자가 36만5천여명을 돌파하여 대한민국의 재외국민으로서 명실공히 조직기반을 확립하게 됨.

 
4) 1970년대

가.1970년 오오사카(大阪) 만박시 본국인초청사업 등을 전개하여,본국과의 연대를 강화함.

나.1972년부터 1973년에 걸쳐 조선총연의 영향을 받은 일부 불순분자들에 의한 민단에 대한 파괴공작이 극심하여, 민단조직이 일시적으로 위기적인 상황에 직면하였으나 조국과 민단을 아끼는 단원들과 청년들의 노력에 의해 정상화됨.

다.민단조직 정상화와 더불어 본국에서 일어난 「새마을운동」에 부응하고자 민단도 새민단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본국의 150여개 부락과 자매결연을 맺고 10여억엔(일화)의 자금을 지원함.

라.1975년7월부터 조총련산하 동포들의 성묘단을 조직, 본국에 보내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약 4만8천명에 달하는 조총련동포들을 민단조직에 포섭함.

마.「새민단」운동을 전개하여 조직정비와 조직강화에 힘쓴 결과, 전국 49개 지방본부, 383개 지부, 약 5천개의 반조직을 구축(당시 1976년3월)하여 약 40만의 단원을 확립하게 됨.

 
5) 1980년대

가.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권익옹호투쟁을 전개하여, 1965년 한일협정에서 미비했던 법적지위와 처우상의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정부와 끈질기게 대립함.
공영주택 입주문제, 아동수당, 연금등의 복지문제, 국적에 의한 취직차별문제, 지문날인 문제 등의 외국인등록법의 인권침해문제 등과 일관하여 계속 대립함.
1986년 「지문날인철폐 100만명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180여만명의 서명을 획득, 권익운동의 계기를 마련하게 됨.
이는 1991년1월10일 한일외상간의 각서를 통해 일정부분에 있어 성과를 거두었음.

나.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민단을 중심으로 재일한국인들이 540 억원(한화) 에 달하는 성금을 모금하여 올림픽 개최를 지원하였으며, 일본인을 포함한 많은 인사들을 참관단으로 조직해 서울에 보내, 홍보활동에도 커다란 성과를 올리는 등 본국과의 유대감을 강화함.

다.본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재일경제인을 중심으로 「재일한국인투자협회」를 조직하여 「신한은행」신설과 함께 금융면에서도 본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해 왔으며, 60년대말부터 70년대에 진출한 재일한국인 기업들을 후원함.

라.민단은 그 밖에 독립기념관 건설모금운동, 평화의 댐 건설모금, 수해의 연금, 바이 코리안운동 (한국물산구매운동), 대전엑스포 지원사업 등 본국에서 일어난 전국민적인 문제, 사업에는 언제나 본국 국민과 더불어 호흡을 같이 해 왔음.

 
6) 1990년대

가.1991년1월10일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에 관한 한일외상간의 합의를 통해, 협정영주 3대이후의 기속적(羈束的)인 영주권부여가 확정되었으며, 지문날인 철폐등에도 일정한 성과가 있었음.
그러나, 처우에 있어서는 국적에 의한 취직 차별, 민족교육권 문제, 지방 자치체에 대한 참정권 문제 등 미비한 점이 아직도 남아 있음.

나.1994년5월, 「91년 문제」해결이후, 민단은 특수한 역사적인 연유로 인해 영주하게 된 재일동포가 일본지역사회에 생활자로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하고, 반세기에 이르는 무권리 상태를 지양하기 위하여 「지방자치체 참정권운동」을 개시함.

다.1996년10월3일 민단 창단 50주년을 기념하여 재일한국인은 일본사회에서 정주해 나갈 것을 내외에 밝히고, 한국인으로서 일본지역사회에서 「공생·공영」을 지향해 갈 것을 다짐함.

라. 1997년말 본국이 IMF위기에 처했을 때 재일동포는 국난 타개에 동참한다는 뜻에서 「외화송금운동」을 전개하여, 약 870억엔의 일화를 송금하였음. 이는 많은 민단 단원에게 본국의 외환위기 극복에 일조를 했다는 자부심을 안겨주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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