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북한을 탈출, 제3국을 경유하고 겨우 일본에 당도한 전 재일 북송 교포들의 일본 정착을 위해서 인도적인 입장에서 원조하기위한 "탈북자 지원 민단 센터"(대표=여 건이 민단 중앙 본부 부단장=당시)이 2008년 6월 3일로 출범 5주년을 맞았다. 지원 대상자는 당초 약 50명에서 이 5년간 3배의 약 150명이 됐다.
지원 센터에서는 앞으로 더 많은 재일 탈북자 동포들이 일본에 돌아올 것으로 예상하고 활동의 계속성 및 강화를 위해 모금 등의 협력을 호소하고있다.
2003년 6월 출범한 지원 센터는 이미 일본에 돌아왔거나 앞으로 일본에 입국해 오는 재일 동포를 중심으로 한 탈북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같은 재일의 역사를 담은 동포로서, 그들의 곤경을 좌시할 수 없다는 자연스러운 애정과 순수한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했다.
많은 동포의 공감을 얻고 탈북자를 지탱하려고하는 고리도 꾸준히 확대되고있다. 모금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민단의 각급 조직, 민주 평화 통일 자문회의 일본 지역 위원, 재일 한국 상공 회의소 회원, 각지 동포와 일본인 유지를 포함하여 많은 성금이 모아지고있다.
지원 센터에서는 그동안 취업 알선, 주택 알선, 일본어 학교와 한국어를 할 수있는 의사의 알선, 건강 진단 등의 지원과 개별 상담 등 정착에 필수적인 요소의 지원을 민단 지방 본부 · 지부 및 단원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실시 해왔다.
또"탈북자 교류회"를 관동과 관서 지역에서 각각 10 회씩 지원에 관한 북한 난민 구제 기금, 북한 귀국 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 등 일본의 NGO 관계자, 민단 관계자 나 의사들도 함께하고 교류를했다. 올해도 격려를위한 교류회를 계획하고있다.
탈북자의 일본 정착을 둘러싼 상황은 여전히 어렵다. 파악하고있는 재일 탈북자들의 상황은 불안정한 재류 자격과 일본어, 취업, 주택 및 사회 적응 문제 등 많은 핸디캡을 짊어지고 어려운 생활을 강요 당하고있다. 또한 북한에두고 온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일본에서 자신의 존재가 표면화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스스로 제한 할 수밖에없는 상황이다.
법적 지위의 불안정함과 함께 불경기인 경제 상황과도 맞물려서 취직은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북한에서 태어난 자녀에게는 일본어 이해, 전혀 다른 생활 관습과 제도 등에 대한 적응은 쉽지 않다. 일본 사회에 적응할대 일어나는 정신적 스트레스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보다 더 세세한 지원이 필요하다.
기아의 일상화가 전하는 북한의 참상을 생각하면 일본에 들어오는 재일 동포 관계 가족들은 더 늘어난다. 이에 따라, 일본어 교육, 자본주의와 일본의 습관, 풍습, 일상 생활의 설명·지도 자원 봉사자의 부족, 지원 자금 부족 등, 머지않아 지원 센터와 NGO가 자주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온다.
2006년 6월 일본 국회를 통과한 "북한 인권법"은 "정부는 탈북자(북한을 탈출한 사람이며, 인도적 견지에서 보호 및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말한다)의 보호 및 지원에 관한 시책을 강구하도록 노력한다"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아직 기능하지 않고 있다.
지원 관계자들은 "일본 정부는 인도주의의 입장에서 탈북자를 하루라도 빨리 『 난민 』로 인정 탈북자들의 정착·자립을 위한 지원을 해야한다. 또한 북송 사업을 추진한 당사자로서 도의적인 의미에서도 지원을 해야 할 입장에있다 "고 공적 지원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북한 · 조총련 및 일본 언론 등의 "북한은 지상 낙원"의 홍보를 타고 일본에서의 민족 차별과 빈곤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자 1959년부터 84년 말까지 북한으로 건너간 동포는 일본인의 배우자도 포함하여 9만 3339명.
하지만 북한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 새로운 차별과 빈곤, 기아"였다. 이 중 다행히도 탈북 후 일본에 입국을 한 것은 현재 약 150명이다.
본 단체는 북한 ( 북조선 ) 을 탈출해서 일본에 건너온 재일동포 중심의 탈북자가 이 땅에서 안정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적인 차원의 원조를 목적으로 2003년 6월 「 탈북자지원민단센터 」 를 설립하였습니다 .
1959년에 시작된 북송사업으로 인해 9 만 3000 명이나 되는 재일동포가 “ 지상 낙원 ” 이라고하는 허위선전에 속아서 북한으로 「 귀국 」 했습니다 .
북송사업은 북한과 결탁한 조선총련이 일본정부 、 일본적십자사와 정당 、 보도기관을 끌여들여 민단의 맹렬한 반대운동을 무시한 채 추진한 것이었습니다 .
이들 「 귀국자 」 중에 약 100 명 (2005년 1 2월말 현재 ) 의 동포와 일본인부인을 포함한 가족들이 일본에 돌아온 사실이 최근 밝혀졌습니다 .
이들은 빈곤과 억압 뿐만 아니라 식량조차도 바닥이 나서 결국 북한을 탈출하지 않고는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든 사람들이었습니다 .
일본에 돌아온 북송동포들의 현상은 일본어 、 취업 、 주택 , 그리고 사회적응문제 등 、 많은 핸디캡을 지닌 채 어려운 생활 해나가고 있습니다 .
또한 북한에 남기고 온 가족의 안전을 위해 일본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활동을 스스로 제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
북한의 「 귀국자 」 에 대한 억압상황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게다가 심각한 식량상황이 계속된다면 향후 더 많은 일본인부인을 포함한 북송동포가 탈출하여 일본으로 돌아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
「 지원센터 」 는 탈북행위 그 자체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본에 돌아온 탈북자와 향후 일본으로 돌아올 전 재일동포를 중심으로 한 탈북자의 일본정착을 지원하는 곳입니다 .
「 같은 재일의 역사를 걸어 온 동포로서 그들의 고통을 좌시할 수 없다 」 는 자연스런운 정과 순수하고 인도적인 입장에서 그들을 지원해갈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
재일동포를 비롯하여 많은 일본인들의 폭넓은 이해와 지원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
북한(북조선)에서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탈북자는 중국과의 국경을 넘어 중국내에서 은신생활을 한 후 한국이나 일본으로 입국하고 있습니다.
북한내에서의 식량부족과 정치적 박해로부터 벗어나기위해 탈출한 사람들은10만 또는 20만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으로 도망을 가도 중국당국에 발각되면 북한으로 되돌려보내져 엄중한 처벌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고 보호, 구출하자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1959년이후 일본에서 북한으로 건너간 재일조선인과 일본인배우자들 중에서도 탈북자 속출하여 약100명이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지원센터는 2004년6월부터 11월에 걸쳐서 약반년동안 탈북자의 정신적건강상황 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의사의 판단에 의하면 북한, 탈북한 나라과 일본에서의 3차적인 정신적고통을 강하게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일차적으로는 북한에서 친족들의 아사(餓死), 고문에 의한 죽음이나 지인이 공개처형당한 일, 또는 일본에서 왔다는 이유로 받은 차별 등에 의한 것, 이차적인 것은 탈북한 곳에서 공안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한 도피생활이 길어진 것과 서로 의지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일 등이 있습니다.
삼차적인 것은 일본에 입국해서도 예전과 많이 달라진 일본과 가타카나말과 영어표기등 언어가 변화한 것이나 일본의 문화나 일본인 자체도 변화한 것에 대한 당혹감 등이 있습니다. 또한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을 생각한 나머지 심적고통이 가중되는 등 삼차적으로 정신적 고통이 축적되는 원인이되어 우울중이나 불면증 등의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탈북자는 빈몸으로 일본에 입국하였기 때문에 일본에 정착할 일시적인 자급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탈북자는 북한에서의 기아, 수용소에서 받은 고문등으로 인해 건강을 해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40년만에 일본에 돌아온 사람이나 북한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모르는 자녀들은 의사에게 병상을 정확하게 일본어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당지원센터에서는 한국어로 진찰을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알선하고 건강진단료 등도 부담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를 진단한 재일한국인 정신과의에 의해 탈북자들은 PTSD(심리적외상후스트레스장해)증상이 많이 나타난다는 보고를 받고 당지원센터가 의사를 동반한 개별방문을 실시하여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통원치료를 받도록하고 있습니다.
민단지부가 보유하고 있는 아파트를 보증인이나 수수료등을 면제하고 임대료도 우대하여 알선하고있습니다.
또한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단원들의 사원숙소의 빈 방을 일시한 무료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 외 자치체와 교섭하여 시나 구가 보유하고있는 공공시설 등에 입주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단원들 중에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여 우선적으로 취직하거나 일본기업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동포가 경영하는 일본어학교에서 수업료(1년6개월에 약100만엔 정도)를 면제받고 통학하거나 주거지에서 가까운 자원봉사자가 일본어교육 시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본도착후 외국인둥록을 비롯한 각종수속도 신속히 완료할 수 있도록 담당자가 동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건강상태가 현저하게 나빠서 움직일 수 없는 경우에는 생활보호자 신청수속을 하고 있으며, 국적에 관한 상담도 행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일본에 살았던 전 재일동포나 일본인부인은 지하철 자동개찰이나 은행ATM의 사용방법을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으며 또한 북한에서 태어난 귀국자자녀들은 생활방법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필요에따라서 지도하고 있습니다. 지도내용은 슈퍼에서 쇼핑하는 방법이나 쓰레기분리 방법등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에 대한 설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탈북자는 본인의 존재가 북한당국에 알려지면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에게 피해가 갈것을 우려해서 신분을 밝히는 일은 극도로 조심합니다. 자신을 밝히지 않고는 교제범위를 넓힐 수 없기 때문에 고독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반년에 한번정도 탈북자간의 교류회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의 생활이나 북한의 상황등 여러가지 정보교환과 함께 몸도 마음도 쉴 수 있는 시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당지원센터는 폭넓은 이해를 얻어 지원을 전개할 예정입니다만, 민간지원체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당지원센터에서는 일본에 입국하는 탈북자에 대해 일본정부가 난민으로 인정하고 일본에 정착할 수 있도록 생활지원프로그램을 제공할 것을 관계기관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59년12월14일 제1차선이 975명의 재일동포를 태우고 청진항으로 출항한 것이 시작입이다.
그 후 67년12월까지 155회에 걸쳐서 총8만8611명이 북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단 중단되었지만 71년5월 재개되어 그 수는 9만3000명(일본인배우자 포함)에 달하였습니다.
50년대 극도의 빈곤과 차별로 인해 재일조선인은 일본에서 삶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용한 조총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교육도 의료도 무료인 사회주의조국」 「지상낙원」 등 사실위반의 캠페인을 전개하였습니다.
민단은 59년12월 「재일한국인 북송반대 투쟁중앙위원회」 라는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하였숩니다. 「재일한국인의 강제추방을 계획하고 있던 일본정책에 편승하여 실행한 비극적인 사태에 직면하여 사실상 민족애와 동포애에서 치밀어오르는 분개감을 금할 수 없어 전세계의 공정한 여론에 이문제의 비합법성을 재차 호소하였습니다.
북송사업이란 「인도주의라는 미명하에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정부의 골칫거리 쫓아내기」 라고하는 지금까지의 설이 얼마전 공개된 일본외무행정문서에서 다시한번 확인되었다. 이 문서는 메이지대학 정보커뮤니케이션학부의 가와시마 타카미네 조교수가 정보공개법에 의거하여 개시청구한 것이었다.
가와시마 조교수는 01년8월20일 외무성정보공개실을 통하여 개시를 청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03년10월31일까지 총수 약2000페이지에 달하는 문서가 공개되었습니다.
가와시마 조교수는 이 문서들 속에서 일본정부가 북송사업을 각료회의에서 승인한 59년2월13일을 전후하여 조일 양 적십자가 제네바회담을 열었던 4월13일까지 귀국사업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약550페이지의 문서를 분석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각료회의승인에 이르기까지의 내부사정」 이라는 제목의 극비문서는 이번에 처음으로 밝혀진 것으로서 주목이 집중되었다. 이문서에서는 한국정부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도」라는 미명하에 어떻게해서던 재일동포의 북송사업을 서두르고 싶었던 일본정부의 「본의」가 비춰졌다.
제일 큰 동기는 「치안상」의 이유였다. 이문서는 「재일조선인출신의 범죄인은 일본인의 약6倍」라고 지적, 「본문제의 조기처리를 필요로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라고 설명. 생활보호세대도 1만9000세대 8만1000명으로 년간17억엔의 경비가 국고와 지방의 부담이 되어 있다고 노골적으로 재일동포에 대한 기피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재일동포의 북송사업을 추진하기위해 북한과 교섭한 일본적십자사의 이노우에 외사부장이 제네바에서 일본측에 보낸 전보 (59년3월24일자)에 의하면 이노우에 외사부장은 「귀환자」의 「의사확인」을 중시.
승선직전까지 확인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고 설득하여 「귀국조건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특히 두번다시 일본에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등을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결국 충분한 확인작업은 실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가와시마 조교수는 「이번에 밝혀진 공개문서의 어느 것을 읽어봐도 재입국할 수 있다고 적혀진 것은 없었다.
말그대로인 편도였다. 그것도 귀환조건의 가장중요한 조건인 귀환처에서의 대우에 대해서 조사한 흔적도 확인할 수 없었다.
(일본정부는)일본사회에서의 기존의 조선차별을 개선한 것이 아니라 차별대상 그자체를 감소시킬 것을 선택하였다」라고 일축하였다.
년도별 북송인원수 | |||||||
---|---|---|---|---|---|---|---|
년도 | 회수 | 인원수 | 가구 | 년도 | 회수 | 인원수 | 가구 |
1959 | 3 | 2,942 | 781 | 1973 | 3 | 704 | 328 |
1960 | 48 | 49,036 | 12,460 | 1974 | 3 | 479 | 245 |
1961 | 34 | 22,801 | 6,696 | 1975 | 3 | 379 | 199 |
1962 | 16 | 3,497 | 1,402 | 1976 | 2 | 256 | 148 |
1963 | 12 | 2,567 | 1,157 | 1977 | 2 | 180 | 103 |
1964 | 8 | 1,822 | 815 | 1978 | 1 | 150 | 52 |
1965 | 11 | 2,255 | 1,046 | 1979 | 2 | 126 | 77 |
1966 | 12 | 1,860 | 855 | 1980 | 1 | 40 | 29 |
1967 | 11 | 1,831 | 873 | 1981 | 1 | 38 | 29 |
1968 | 중 단 | 1982 | 1 | 26 | 18 | ||
1969 | 1983 | 0 | 0 | 0 | |||
1970 | 1984 | 1 | 30 | 23 | |||
1971 | 7 | 1,318 | 485 | 1985 | 0 | 0 | 0 |
1972 | 4 | 1,002 | 589 | 合計 | 186 | 93,339 | 28,410 |
당지원센터는 폭넓은 층의 모급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탈북한 전 재일동포와 그 가족의 일본정착을 위해 여러분의 따뜻한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모금에 협조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우체국구좌 00150-5-546257[지원센터]
자까운 한국민단에서도 모금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①일본어교육
교사자격없어도 일상적인 생활회화를 함께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어학력이 향상됩니다.
②일상생활수단
교통기관, 금융기관 등의 이용방법, 물건 사는 방법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함께 행동하면서 지도해 주실 분.
사업을 하시는 분이 사원이나 아르바이트를 모집할 경우 당지원센터와 상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자원봉사자는 등록제입니다 많은 응모를 부탁드립니다.